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고, 러시아와 영국을 반프체제로 만들어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나폴레옹3세를 전쟁으로 유도해 승리했음.
프랑스는 교황령의 로마에 주둔군을 배치하고 있었는데, 로마 종교계가 프랑스 정치권을 비호하고 있었기 때문임.
하지만 본국의 급박한 사정에 의해 로마 주둔군을 철수시켰음.
이 틈을타 이탈리아는 로마 교황령을 장악하고, 교황령은 지도에서 사라지게 됨.
프랑스 티에르 대통령
전쟁에서 진 프랑스는 왕정이 몰락하고, 공화정이 들어서게 되고, 티에르는 초대 대통령이 됨.
프랑스 정치권은 종교를 두고 보수와 진보로 나뉘었음.
보수는 사제계층의 지지와 종교계의 지원을 받았고, 진보는 종교계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음.
티에르는 중도적이었지만, 보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종교계의 편을 들고, 교황령을 점령한 이탈리아와의 관계를 악화시켰음.
하지만, 1873년 티에르가 실각함.
프랑스 대통령 드 마크마옹
티에르가 실각하자 보수 내 왕당파인 드 마크마옹이 집권함.
보수 내에 왕당파는 3 파벌로 나뉘어 있었는데, 부르봉파-오를레앙파-보나파르트파 임.
극적으로 부르봉파와 오를레앙파를 협상에 성공시켜 왕정으로 복귀하고자 하였음.
하지만, 왕위에 내정된 샤를 10세의 직계 후손이 거절하였음.
그래도 왕당파는 의회에서 다수였기 때문에, 마크마옹과 손잡고 보수적인 정책을 추진함.
바로 종교계의 권위를 '혁명 이전'으로 되돌리겠다는 것이었음.
독일 수상 비스마르크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왕정복고 추진을 보고 다시 한번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봤음.
그리고 현재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는 프랑스를 가볍게 누를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전쟁을 계획했음.
하지만, 생각보다 빠른 프랑스의 정치적 안정과 극우주의자, 애국주의자 등 보수의 득세에 긴장하기 시작했음.
그래서 다시 한번 '고립 정책'을 펼치기 시작함.
그 빌미가 바로 이탈리아의 '교황령 점령' 이었음.
프랑스는 정치에서 종교의 색체가 짙은 영국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게 러브콜을 보냄.
하지만 가톨릭 국가가 아니었던 영국과 러시아는 별 생각이 없었음.
게다가 프랑스의 국력이면 독일과 1:1로 붙어도 여전히 꿇리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음.
반면, 오스트리아는 달랐음.
일단 프랑스와 같은 가톨릭 국가였고, 중부 유럽에서의 독일의 성장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음.
이런 유럽의 속사정을 알고 있던 비스마르크는
1873년, 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의 '삼제 동맹'을 체결시킴.
하지만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비스마르크는
영, 러에게 삼제 동맹의 존재가 절대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몇번을 당부했고,
중앙아시아에서 영-러간의 협상을 중재하여 독일에 대한 의심을 줄였음.
이탈리아 총리 카보우르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이었고, 이탈리아는 카보우르의 집권 이래로 계속해서 보수파가 집권했음.
가톨릭 국가로서, 프랑스와의 친선을 도모했지만 교황령 점령으로 택도 없었음.
전쟁에서 진 프랑스가 복수를 위해 이탈리아에게 접근할줄 알고 내심 자만감을 가졌지만, 프랑스는 오히려 내부적으로 단결했음.
이에 삐진 이탈리아 보수 내각은 독일과의 친선으로 방향을 돌림.
하지만 독일과 이탈리아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음.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 주세페 마치니
1870년, 이탈리아 통일전쟁이 샤르데냐 왕국의 주도로 끝났음.
하지만 마치니는 이탈리아가 왕국이 아닌 공화국이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음.
이탈리아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를 도우려 했었고,
비스마르크는 이런 마치니를 지원했고, 교황을 독일로 망명시킬 계획을 세움.
하지만 독일과 이탈리아는 모든 과거는 잊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게 됨.
독일이 프랑스의 친 종교적인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 조건이었음.
마치니는 공화정 전략을 실패하고 사망했음.
이탈리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1873년,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동맹이 추진될 기미가 보였음.
그러자 에마누엘레 2세가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해 오스트리아의 교황령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오-프 동맹을 저지하고 이탈리아와 불가침조약을 체결함.
프랑스는 이렇게 영-독-오-이에게 고립된 현실을 마주하게 됨.
하지만 비스마르크가 똥볼을 차기 시작함.
비스마르크는 1873년부터 1883년까지 가톨릭을 탄압하는 정책인 '문화 투쟁'(캄투어캄프)을 실행함.
독일 의회내 가톨릭 중앙당은 독일의 자유주의를 요구하며 비스마르크 내각과 충돌했음.
비스마르크는 반정부 기질을 보이는 데다, 가톨릭과 엮인 야당이 마음에 안들어서,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9세에게 이들을 제지시키라고 요구했음.
비오 9세가 거부하자, 비스마르크는 대대적으로 가톨릭 중앙당을 탄압하기 시작했음.
또한 반정부주의자들을 탄압하는데 성공했는데, 독일의 통일이 2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곳곳에서 민족주의적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 것은 비스마르크에게 정치적 악재였음.
1870년,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통일된 독일 제국은 가톨릭 세력과 개신교 세력이 결합된 상태였음.
특히, 남부 독일, 프랑스에게서 획득한 알자스-로렌, 오스트리아에게서 획득한 슐레지엔은 독실한 가톨릭 지역이었음.
비스마르크의 '문화 투쟁' 정책으로 반정부주의자들을 모두 진압해 국내적으론 비스마르크에겐 호재였지만,
비스마르크의 외교정책이 독일의 거대한 위기를 맞게됨.
-2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