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의 백제 멸망은 익숙한 주제입니다. 불과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있었던 이 일은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낳았고, 이는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660년 6월~7월의 백제 멸망과정을 사료 토막과 함께 되짚어보고자 합니다. 가볍게 보실 분들은 볼드체는 넘기고 읽으시면 됩니다.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法敏)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 에서 소정방(蘇定方)을 맞이하게 하였다. (중략) 법민이 돌아와서 정방의 군대 형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하자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庾信),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 등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50,000명을 거느리고 그에 호응하도록 하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 머물렀다. (삼국사기 무열왕본기)
660년 3월 당 고종이 백제 정벌을 선포하고 소정방을 필두로 한 13만(혹은 10만)의 당 대군이 바다를 건너옵니다. 이들은 같은 해 6월 21일 덕물도에서 신라군과 접선했고, 양군이 합의한 작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군은 바닷길을 통해 백강(웅진강) 하구로 거슬러올라가 사비로 진격한다.
-신라군은 육로로 사비 방면으로 진격한다.
-합류 기한은 같은 해 7월 10일로 한다.
가을 7월 9일에 김유신(金庾信) 등이 황산(黃山)의 벌판으로 진군하자 백제의 장군 계백(堦伯)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에 의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병사들은 힘이 다 하였다. (중략) 관장(관창)이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제가 적진 속으로 들어가 장수를 베지도 못하고 깃발을 뽑아오지도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쥐어 마시고 다시 적진으로 가서 날쌔게 싸웠는데, 계백이 사로잡아 머리를 베고 말 안장에 매달아서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붙잡고 흐르는 피에 옷소매를 적시며 말하기를, “내 아이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왕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라고 하였다. 삼군이 〔이를〕 보고 슬퍼하고 한탄하여 죽을 마음을 먹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진격하자 백제의 무리가 크게 패하였다. 계백은 죽고, 좌평(佐平) 충상(忠常)과 상영(常英)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삼국사기 무열왕본기)
소정방이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웅진강(熊津江) 하구에 이르니 적병이 강을 근거로 진을 치고 있었다. 소정방이 동쪽 강변으로 올라 산을 타서 진을 치고 크게 싸웠는데 (배들이) 돛을 올려 바다를 덮은 것이 이어졌다. 적의 병사가 패배해 죽은 사람이 수천 명이었고 남은 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밀물을 만나 배들이 잇달아 강으로 들어갔고 소정방은 강변에서 진을 치고 수륙으로 나아가 노를 젓고 북을 치면서 진도(眞都)로 나아갔다. 성에서 20여리 거리에서 적이 나라의 힘을 모두 기울여 와서 막았는데 크게 싸워 격파해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만여 명이었고, 쫓아 달려가 성곽으로 들어갔다. (구당서 소정방전)
나당연합군의 진격 소식을 들은 백제는 아예 손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효율적인 선택을 하지도 못했습니다. 당군을 우선 막을것이냐, 신라군을 먼저 막을것이냐, 둘 다 막을것이냐 여부를 두고 시원스러운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입니다. 부랴부랴 신라군을 막기 위해 계백을 보내긴 했지만, 그러던 사이 신라군은 탄현을 넘었고, 당군은 백강 하구를 지키던 백제군을 격파하였습니다.
삼국사기 의자왕본기를 볼 때 이미 백강 하구가 당군에게 장악된 상황에서, 계백의 군대가 황산벌에서 궤멸당하게 되자 의자왕은 당장 가까운 곳에 있는 당군을 저지하고자 가능한 모든 병력을 끌어다 쓴 걸로 보입니다. 물론 잘 안됐죠.
결국 백제의 모든 항전수단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7월 11일 신라군과 당군이 만납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위에서 언급한 양군의 합류기한은 7월 10일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때문에 트러블이 일어났습니다.
이날에 소정방(蘇定方)은 부총관 김인문(金仁問) 등과 함께 기벌포(伎伐浦)에 도착하여 백제의 군사를 만나 싸워서 크게 깨뜨렸다. 유신(庾信) 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소정방은 유신 등이 약속한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督軍)인 김문영(金文潁)을 군문(軍門)에서 목을 베려고 하였다. 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대장군이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한 날짜에 늦은 것 만을 가지고 죄를 삼으려고 하는데, 나는 죄가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치른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섰는데,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소정방의 우장(右將)인 동보량(董寶亮)이 〔소정방의〕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 “신라의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라고 하자 소정방이 곧 문영의 죄를 용서하였다.
영화 황산벌(2003)에서의 김유신과 소정방의 갈등
영화에서는 백제 멸망 이후 양군이 갈등한 것으로 각색되었습니다.
사실 이 사건은 단순히 신라군이 합류기한을 어겨서 일어난 것으로만 보기에는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때문에 연구도 많고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대략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소정방이 신라군을 통제하려고 한 시도를 막은 것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2012.)
-소정방의 기선제압과 신라군 통제 시도를 막은 것 (서영교,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 2015)
-군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소정방과 김유신의 충돌 (남정호, 「660년 대백제전에서 발생한 소정방과 김유신의 갈등 사건」, 2018)
-신라까지 침공하려는 당군의 전략을 입수한 김유신의 초강경대응 (이민수, 「백제 멸망기 당의 신라 침공 계획」, 2019)
-백제 고지(故地) 관련 문제에서 신라를 배제하려는 소정방에 대한 김유신의 초강경대응 (전경효, 「7세기 후반 나당관계와 김유신」, 2014)
당장은 백제라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갈등이 봉합되긴 했습니다만 이는 나당연합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지 틀어질 수 있음을 암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실제로 이후에도 몇 번의 위기를 겪은 뒤 그것이 나당전쟁으로 표출되기도 했죠.
그 왕인 의자(義慈)와 태자인 융(隆)은 북쪽 변경으로 도망갔는데, 소정방이 나아가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의자의 둘째 아들인 태(泰)가 자립해 왕이 됐는데 적손인 문사(文思)가 말하길, “왕과 태자가 비록 모두 성을 나왔지만 그 몸이 온전한데, 숙부께서 병마를 이끌고 멋대로 왕이 되었으니 가령 한병이 물러가더라도 우리 부자는 온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좌우의 무리를 이끌고 성 아래로 와 항복했고, 백성이 따랐으니 태는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소정방이 병사들에게 성을 올라 깃발을 올리도록 명하자 이에 태는 문을 열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 대장인 예식(禰植) 또한 곧 의자를 거느리고 항복하였고, 태자 융과 여러 성의 성주들이 모두 함께 항복하였다. (구당서 소정방전)
백제는 소정방에게 수 차례 뇌물을 보냈지만 소용없었고, 백제 지도부는 각자도생의 길을 택하게 됩니다. 의자왕과 태자인 부여융이 웅진으로 도망가자 차남인 부여태가 왕을 자칭한 것인데요. 사실 게임 다 끝난 마당에 이러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 뇌물보내도 안돼 물릴 생각 없어 돌아가서 목 닦고 기다리셈
결국 부여태가 먼저 항복하고, 7월 18일 웅진으로 도망간 의자왕과 부여융 역시 제압되어 백제의 역사가 마무리됩니다. 나당연합군이 덕물도에서 접선한 지 한달도 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흑치상지가 이를 몹시 두려워하여 좌우의 10여 명과 함께 피해 본부로 돌아가 흩어진 자들을 한 데 모아 함께 임존산(任存山)을 지키면서 목책을 쌓고 굳게 지키니 열흘만에 귀부한 자가 3만여 명이었다. (구당서 흑치상지전)
무왕의 조카 복신(福信)은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였는데, 이때 중 도침(道琛)을 데리고 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전 임금의 아들로서 왜국에 인질로 있던 부여풍(扶餘風)을 맞아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서북부에서 모두 이에 호응하니… (삼국사기 의자왕본기)
백제의 불꽃은 아직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663년 백강 하구에서 최후의 싸움에서 패배할 때까지 약 3년 동안 끈질기게 저항하게 됩니다.
제가 배우고 공부하고 겪었던 것을 종합하면 오늘날 신라=민족반역자라는 시선은 그 기원이 신채호에서 나오는 거고 과도한 국뽕과 결합되어 이어져오는거지 지역감정과는 별 상관이 없는거죠 누가보면 호남사람만 신라=민족반역자라고 매도하는 줄 알겠네요
어차피 전라도야 백제 역사에 있어서 경기도나 충청도에 비하면 강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지역이기도 하고, 오늘날 전라도 지자체에서 백제 후예 자칭하면서 마케팅한다면 그것도 그것나름대로 웃기는 노릇이긴 하겠네요
그러나 제가 알기로 호남 지자체 혹은 호남 사람들을 대표하는 집단이 지역감정을 고취하려고 신라를 민족반역자라고 매도하면서 경상도까지 싸잡아 비판하는 사례가 없었던 걸로 알고있는데
이렇게 엄한 사람 몰아가시니 정말 당황스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