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은 중요하지 않다. 내 삶은 이미 프랑스에 봉헌된 것이었다. 만약 여러분이 나를 단죄하려 한다면,
나를 그 단죄의 마지막이 되게 해달라. 그러나 나는 세계를 향해 말하려 한다. 여러분은 정의의 이름으로
죄없는 사람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라고. 판결 후에는 하느님과 후손들의 심판이 올 것이다. 나는 프랑스를 믿는다."
-앙리 필리프 페탱, 재판정에서-
1945년 7월 23일 프랑스의 어느 재판소에서 89세의 노인을 상대로 매우 기묘한 재판이 열렸다.
그가 원수복을 입고 재판정에 들어와 청중을 향해 경례를 하자 모든 사람들이 기립하여 그에게 답례를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예를 표한 그 노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앙리 필리프 페텡 (1856.4.24 ~ 1951.7.23),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가. 프랑스의 국민적인 영웅이었으나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은 인물. 그러나 페탱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는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1. 베르됭 전투, 전국민적인 영웅이 되다
"그들은 못 간다!"
-앙리 필리프 페탱, 베르됭 전투에서-
때는 1차 세계대전, 1914년 벌어진 마른 전투로 인해 슐리펜 계획이 실패한 뒤 독일과 프랑스의 전선은 고착화 되었다.
이에 독일은 최정예 병력을 끌어모아 요새를 돌파, 최단거리로 파리를 점령하여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 작전이 실패했을 경우 그 요새에 상대방 병력을 밀집시킨 뒤 적을 소모시켜 전쟁을 끝내겠다는 대체 작전도 있었다.
그 장소로 선택된 곳이 바로 베르됭 요새였다. 독일군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베르됭 요새를 포격, 병력을 진격시켰고
프랑스군은 10만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제 프랑스의 운명은 풍전등화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페탱으로 사령관을 교체, 방어전에 나섰다. 참호전의 대가로 1차세계대전 때 명성을 날린 그는
전선 도착 반나절만에 방어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20만 병력과 이에 따르는 보급물자양을 계산하여 병력을 보강, 잃은 영토를 회복하고
소모전을 유도했다. 결국 독일은 10개월이 넘도록 베르됭을 뚫지 못했고 오히려 독일의 병력이 급속히 소모되어 전황이 반전되었다.
결국 베르됭은 제1차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돌아가게 만든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페탱은 구국의 영웅으로 떠받들여 졌다. 프랑스의 거의 모든 마을에
페탱의 이름을 붙인 거리가 만들어 졌으며, 프랑스의 관청들과 여러 가정들은 그의 사진을 내걸었다.
그는 프랑스의 '원수'라는 칭호와 함께 일곱 개의 별이 박힌 지휘봉을 받는 영광을 누리고 군에서 은퇴하게 된다.
2. 제2차 세계대전, 비시 프랑스의 수반이 되다
"영광의 날에도,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있었습니다. 어려운 날에도, 저는 여러분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
-앙리 필리프 페탱-
페탱은 80대 중반에 프랑스군에서 은퇴, 제2차세계대전 당시엔 주스페인 프랑스 대사로 있었다.
이는 자신의 제자였던 프랑코와의 개인적인 친분 덕택이었다.
제2차대전 당시 패전 직전이 되자, 프랑스는 페탱의 귀국을 요청했다.
당시 프랑스는 위기에 처해 있었고, 국민들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렇기에 프랑스의 영웅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페탱이 온다면 이러한 혼란상을 수습할 수 있을 것이며,
국민들에게 믿음을 줄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때 프랑코는 가면 오명을 뒤집어 쓸 것이라고
스페인에 남아달라고 요청했으나 페탱은 이를 뿌리치고 프랑스로 향했다.
과거 페탱의 부하였던 드골은 페탱에게 같이 영국으로 가서 전쟁을 계속해나가자고 주장했지만,
페탱은 '패전은 현실이다. 현실을 인정하고 최선을 도모해야 한다' 며 거절했다.
드골은 이후 영국으로 망명, 자유프랑스를 세우게 된다.
이후 페탱은 히틀러와의 휴전협정에 나섰고, 협정에 따라 프랑스 국토의 5분의 3이 독일의 직접 점령하에 놓이고,
두 나라 사이의 고질적 분쟁지역이었던 알자스로렌은 독일에게 귀속되었으며,
남은 프랑스 남부 지역은 프랑스 정부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종전 후 약 한 달 뒤인 7월 10일에 남부 프랑스의 비시에서 제3공화국 최후의 국회가 열려,
페탱에게 행정권만이 아니라 입법권까지 포괄하는 ‘전권’을 부여했다. 이로써 페탱은 ‘비시정부’의 국가수반이 되어
5분의 2의 프랑스를 2년여 동안 통치하게 되었다. 페탱은 노동자 징발이나 물자조달 등의 문제에서 독일의 요구에 협력했다.
그러나 페탱은 끝까지 참전을 거절했고 독일에 우호적인 중립국으로서 남았다.
다른 한편으로 좌파정치인들에 대해 리옹 재판을 여는 등 자신의 정적들에 대해 사법살인을 자행하기도 했고,
레지스탕스는 프랑스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역자로 보았고, 이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체포하여 독일에 넘기거나 처벌했다.
이런 양면성 때문에 페탱의 협력이 어쩔수 없는 차선책이었는지, 아니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반역인지는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
3. 연합군의 파리수복과 나치협력자 청산, 그리고 페탱의 귀환
"..... 그러나 몇시간 후 스위스대사는 다시 나를 만나러 와, '원수가 프랑스 귀국을 강력히 요청했습니다.
우리 정부는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필리프 페탱은 프랑스 국경으로 인도될 것입니다.'라고 전했다.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
늙은 페탱 원수는 그가 심판을 받아 선고될 것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귀국결정은 용감한 것이었다."
-샤를 드골, '전쟁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은 종전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처참한 패배를 당한 독일은 소련을 상대로 더이상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그리고 미군은 일명 횃불작전을 실행, 북아프리카 지역 상륙작전에 성공했다. 미국은 페탱의 비시정권과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프랑스군의 소극적인 저항으로 인해 문제없이 상륙할수 있었다. 분노한 히틀러는 비시 프랑스를 점령하고 페탱을 독일로 끌고 가버렸다.
이때 페탱은 독일군의 점령에 맞서서 전쟁을 시작할 수도 있었지만, 저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항복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통해 드디어 자유프랑스는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의 영토를 해방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샤를 드골은 본격적으로 나치협력자 청산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동안 페탱은 친나치 프랑스 임시정부의 수립을 거절하고,
히틀러에게 프랑스로 돌아가겠다고 설득했다. 결국 페탱은 독일을 떠나서 스위스에 들어섰다.
이때 주프랑스 스위스대사였던 스투키는 페탱에게
'원수가 스위스에 남기를 희망한다면, 스위스 정부는 거절하지 않겠다.'라고 망명제안을 했다.
이는 훗날 밝혀진 대로, 드골의 정치적인 수였다.
드골은 몰래 스위스 정부로부터 프랑스 임시정부가 페탱의 신변인도를 요청하면 거절하겠다는 확약을 받았던 것이다.
이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가장 큰 이유로는 나치협력자 청산 문제가 있었다.
만약 페탱이 돌아올 경우, 불붙기 시작한 나치협력자 청산에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있었다.
처벌이 이루어질 경우, 페탱은 동정여론을 받아 프랑스 국민의 반감이 심해질 것이며,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나치협력자 청산은 그 명목을 잃고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있었다.
(다만,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고 자신의 직속상관이었던 페탱에 대한 동정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페탱은 망명을 거부하고 프랑스로 돌아오는 결정을 내렸다.
4. 페탱의 재판
"오늘, 이 재판정에 서있는 피고는 오랫동안 가장 다양한 국민감정을 촉발시킨 장본인이다. 여러분들이 잘 기억하듯,
그는 정열적인 찬미와 국민적인 사랑을, 다른 한편 이에 반해서 극단적 증오와 적대감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
여기서 우리가 피고를 재판한 뒤, 후일 어느날 역사가 다시 이 재판부를 심판할 것이며
또한 재판의 과정에 따라서 이 재판의 분위기 역시 평가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몽지보 재판장-
(1) 프랑스의 정전 협정은 반역이었는가?
최초의 고발장은, 페탱이 공화국을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가 적혀 있었다. 검사는 페탱이 오랜기간 반역을 꾸몄다고 주장했다.
마침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패전할 위기에 처하자 오랫동안 구상한 그의 반역을 시행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9일이 넘도록 검사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이 부분의 고발을 철회해야 했다.
그러자 검사는 정전협정 자체가 '반역'이라는 주장을 계속했는데, 이 혐의는 입증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절차적'으로는 국회의 동의를 받아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변호인 측은, 프랑스는 페탱이 오기전에 이미 사실상 패전했으며,
정전협정 덕분에 프랑스 정부가 유지되고 북아프리카와 식민제국이 독일에게 넘어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검사는, 만약 페탱이 휴전협정을 맺지 않았다면 프랑스 전역에 레지스탕스 운동이 활발해 졌을 것이고,
그렇다면 곧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이에 변호인측은 그렇다면 스탈린그라드 대신 프랑스 전역이
2차세계대전의 베르됭이 되어 페허가 되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2) 페탱은 나치와 협력했는가?
검사측은, 15만명의 프랑스인이 나치에 의해 총살됬으며, 75만명의 프랑스인 노동자가 독일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11만의 프랑스인이 정치적 이유로, 12만명은 인종차별정책에 의해 나치 강제수용소에 이송됬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또한 유태인을 규제했고 그들을 나치에 넘긴 사실, 레지스탕스를 붙잡아 독일에 넘긴 사실이 지적되었다.
변호인측은 독일은 2백만명의 프랑스 노동자를 요구했으나, 64만 1천명의 지원자를,
그것도 11만의 프랑스인 전쟁포로를 석방한다는 조건으로 얻을수 있었다고 반박했다. 또한 유태인을 규제했으나,
그는 유태인에게 노란색 별 표시를 부착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프랑스국적을 받은 외국인들의 국적을 박탈시키는
법 개정안을 거부해 유태인 대량검거를 사전에 예방하였고 결과적으로 프랑스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나치스 점령하의 유럽에서 가장 적은 숫자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또한 변호인측은 페탱이 히틀러의 제의에도 끝까지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중립국으로 남은 사실, 횃불작전 당시 저항하지 않았던 일과
페탱의 개인적인 일화들, 미국 대사의 서면증언을 통해 그가 나치의 협력자라는 주장을 반박하려 했다.
사실 페탱의 재판은 당시 나치청산 분위기와 맞물려서 공정하지 못했다고 학자들은 보고있다.
증거를 모을 시간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고, 페탱에게 유리한 증언은 중간에서 끊는다든지, 증인에 대한 질문이 불공정하게 배정된다든지.
(사실 뭐 페탱이 좌파 정치인들이나 레지스탕스들에게 한 사법살인들보다는 공정했어서 딱히 불평할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배심원 표결결과 13대 14로 사형선고가 확정되었다.
드골은 이를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페탱은 5년 8개월 뒤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페탱의 평가는 현대에도 매우 애매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1951년엔 페탱원수추모협회가 발족되어 오늘날까지도 활동하고 있으며,
(당분간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지만.) 여러번 재심청구를 하기도 했다.
1973년에는 그의 묘가 베르됭 전몰자 묘지로 옮겨져야한다며 극우파들이 그의 관을 도둑질하기도 했지만,
프랑스 경찰이 이를 찾아서 당시 대통령이던 조르주 퐁피두 명의의 화환과 함께 일드외 섬에 재매장하는 일도 있었다.
1968년, 샤를 드골은 페탱의 묘에 꽃을 헌화했으며, 1978년 방데의 도지사가, 그리고 10년뒤 미테랑 대통령이
또다시 같은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는 최소한 페탱이 프랑스에서 단순한 나치협력자로 평가받지는 않는다는 증거라고 할수 있겠다.
6. 말말말
"페허와 무덤을 해방시킨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필리프 페탱-
"영광스러운 군인의 이 불쌍한 그림자가, 노년의 허영을 위해 자신의 명예와 조국을 팔았다."
-샤를 드골-
"페탱의 재판은 정당성이 의심스러운 정치 재판의 전형이었다."
-페트뤼스 포레, 페탱 재판 당시 배심원-
"나는 휴전을 원하지 않았고, 다수 프랑스 국민이 그랬던 것처럼 페탱을 잘못 보았다.
나의 유일한 희망은 정의를 바로 세움으로써 페탱 원수에 의해 길을 잃은 많은 프랑스국민들에게 앞길을 밝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한 피고인이 있으며, 동시에 한 희생자가 있으니 그는 다름 아닌 프랑스 국민 자신이기 때문이다."
-폴 레이노, 프랑스 침공당시 대통령-
"감히 누가 누구를 재판하는가."
-웨이강, 프랑스의 장군-
“우리들이 과거에 겪은 모든 불행은 민족배반자들에 대한 척결을 거부한데서 왔다.
오늘날 우리가 또 다시 나치협력 반역자의 머리를 강타하기를 주저한다면 우리 미래에 엄청난 위험이 닥칠 것이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프랑스 공화국은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
-프랑스 문학-
"프랑스는 하나의 활대에 두개의 시위를 걸어야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요.
1940년 6월, 프랑스는 페탱의 시위도 필요했고 동시에 드골의 시위도 필요했던 겁니다."
-레미, 드골의 심복이자 레지스탕스-
"우리가 한 것은 전쟁이며, 비시가 한 것은 전적으로 항복이다."
-샤를 드골-
"페탱은 이중 게임을 하면서 독일을 돕는 체하며 실제로는 방해했다."
-샤를 트론취-
"페탱은 그가 해방의 길을 열었다고 주장한다. 해방을 완성한 반나치저항운동 출신 판사들이 그를 재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페탱파는 나치에 의해 총살되고 나치독일의 강제수용소에 유배된 수많은 순교자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페탱은 비시정권의 희생자들을 보지 못했다. 페탱파야말로 비시정권에 희생된 자들의 행동을 깊이 성찰해야만 한다."
-르몽드지-
"페탱 원수가 조국을 배반했다는 말은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이고, 오히려 조국에 봉사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한 지도자가 너무나 비극적인 상황에서 국가를 통치했을때, 그의 행동과 정서를 잘 이해해야 한다.
수년동안 운명적 분열 끝에 드디어 국민간 대 화해를 할 때가 오지 않았는가?
서로가 서로를 살육하는 프랑스를 더 이상 보지 않기 위해 국민 각자가 개인적이며 당파적 정열을 자제해야 한다.
조국해방의 영웅, 드골 장군을 중심으로 모두가 손에 손을 잡고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함께 일하자."
-리에나르 주교-
"이것은 살아있는 증오요, 자유와 독립, 공화정을 모두가 사랑하게 만드는 대단히 효과적인 증오다.
우리는 페탱의 사형을 요구한다. 정의와 도덕과 조국이 그의 사형을 요구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젊은 세대가 앞으로 잘 살기 위해서는 이 음흉한 늙은이를 사형에 처해야한다.
프랑스가 살기 위해 패탱을 사형시켜야 한다."
-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
"귀하(페탱)는 우리의 요청에 따라 추축국에는 불리하고 영미연합군에게 유리한 행동을 취했다.
나는 귀하의 근본목적이 프랑스국민의 안녕과 질서를 보호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비시주재 미국대사 리하이 장군의 서면증언.-
(페탱의 재판 당시 재판정에서 낭독되었다.)
"1940년 6월, 전쟁의 패배라는 일격을 받아 멍한 상태에 있는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엄청난 폭격에 신경이 크게 날카로워져 있었고, 물질적 대응능력을 내 개인의 판단으로는 찾을 수 없는 상태였다.
부동의 자세로 땅에 엎드린 국민이 그때 절망의 늪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때, 이 나라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우리가 제의하는, 그래서 상황이 악화하는 휴전이란 것은
불명예스러운 조약이 아니라 그것은 조국의 이익이 합치되는 합의이다.' 라고.
나치독일과의 휴전협정을 이해할수 없었고 이때문에 시련을 당한 프랑스국민은 그의 말이 과거 승리했던 전쟁영웅의 이름으로,
영광과 승리와 군의 명예의 이름으로 말하기 때문에 그를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거대하고 잔인한 도덕적 신뢰의 배신, 이것이 국가반역이 아니고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레옹 브룸, 사회당지도자-
"페탱재판은 스캔들이다. 기소장에 의한 대부분의 내용은 미국법원이라면 조금도 수용될 수 없는 것들이다.
페탱이 공화정체제에 반대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휴전협정은 국가반역이 아니며, 페탱 원수에게
권력을 이양한 것은 완전히 합법적이었다. 프랑스는 공공기관의 옷을 모두 세탁하느라고 분명 큰 고통을 치르고 있다."
-프랑스주재 미국대사 케퍼리, 워싱턴에 보낸 보고서에서-
"무거운 표정을 한 전 총리들과 음모 냄새를 풍기며 공범처럼 보이는 군장성들과 반성할 줄 모르는 나치독일 협력자들이
역겹게도 휴전협정과 항복을 혼동했다. 고발당하고, 고통받으며, 투쟁하고, 죽어간 프랑스국민을
대변하는 우리가 페탱을 고발한 범죄는 바로 반인도적 범죄이다."
-크로드 몰간, 레 레토르 프랑세스지에 실린 논평-
"페탱의 재판은 끝나지 않았다. 이 재판은 영원히 폐정될 수 없을 것이다. 변호도 결코 종결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페탱이 스위스의 호수 가에서 수치스럽게도 망명처를 구했다면, 그의 사건은 이미 종결되어 끝난 것으로 분류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의 정의의 심판대 앞에 출두했다. 페탱사건은 이 때문에 아무것도 끝난 것이 아니다.
그를 규탄하거나 변호하기 위한 대화와 토론은 이 세기에서 저 세기로 이어가면서 계속될 것이다.
그의 찬미자이든, 반대자이든 간에 우리 모두에게 절반은 배반자이며 나머지 절반이 희생자인
비극적 모습이 앞으로도 계속 남게 될 것이다."
-프랑수아 모리악, 프랑스의 대문호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