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래에 와서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초래한 것입니다.
지금 천조는 귀국을 금구 무결한 국가로 삼으려고 하는데
귀국은 이를 알고 있습니까?"
-선조실록 39권, 선조 26(1593)년 6월 5일 무자 5 번째 기사-

귀국의 강한 군대는 본디부터 천하에 소문이 났는데,
수나라 당나라 때는 그리 굉장했지만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난에는
어째서 그리 심히 겁을 내었습니까?
-<금계일기> 5월 20일자 기록-
"중원 본토인 여응주란 자가 글로 써서 보이기를
'가정(嘉靖) 연간에 왜적이 소주·항주를 함락했었으나
그뒤에 방비를 잘했기 때문에 지금은 걱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의 소매를 잡고
'이런 넓은 소매로 전쟁터에서 싸울 수 있겠는가?' 하고,
갓을 가리키면서
'이런 싸맨 머리로 전쟁터에서 싸울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시를 지어 보이기를,
<시부는 진나라의 유풍이요,
병서에 대해 온 나라가 모른다.
높다란 관이 무인의 고깔이요, 넓은 소매옷 의 군복일세.
무딘 창은 싶나무와 같이 썩고, 성을 쌓은 높이는 어깨와 가지런하네.
왜구가 이르렀다는 소문을 듣자, 팔도가 조각 구름처럼 흩어졌네.>
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이 김명원과 같이 앉아 있을 때
신들의 갓과 소매를 가리키고 웃으면서
'이렇게 하고서 왜적을 제압할 수 있겠는가?'고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35권, 선조 26(1593)년 2월 20일 乙已 2번째기사-

"지금 만약 싸우려고만 한다면
2~ 3년이 못가서 귀국이 다시 병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보아하니 귀국은 오로지 시부만을 숭상하고
무비는 닦지 않았는데, 이렇게 하고서도
적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선조실록 36권, 선조 26(1593)년 3월 10일 을축 1번째기사-

수나라와 당나라 때에는 일찍이 강국으로 불렸는데
지금은 어찌 이토록 나약한가.
당신들은 당신 나라에 돌아가 국왕에게 고하고
自强에 힘써 나라를 보존하도록 하라
-速東巡撫 李化龍의 발언-

명에서 황자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1626년(인조 4) 조선에 왔던
明使 姜日廣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오는 도중 평양에 들렀고,
그곳에서 薩水大捷을 회상했다.
그는 평양성을 바라보며, 성을 기어오르기가 쉽다고 한 뒤,
수당이 고구려에게 패한 것은 성 때문이 아니라
對慮나 褥薩 등 고구려의 관인들이 守城을
잘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강왈광은 또한, 당시 조선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난을
회상하며 결국 모든 일의 성패는
사람에게 달린 것이라고 언급했다.
(明) 姜日廣, 「帽軒紀事」15页, 丙寅 6월 発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