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 - 결혼도 못하고
김현철 친구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었는데
집안의 반대를 이겨내고 친지들에게 인사를 다니고 있었음.
그런데 결혼을 앞두고 여자친구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게 됨.
병원에서 여자친구의 마지막을 배웅하고 나니 새벽 6시.
마음이 착잡했지만 자신을 기다리는 건 회사의 업무여서
하릴없이 출근을 했다고 함.
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 식당에서 한 숟가락 뜨는 순간
그제서야 눈물이 터져나왔다는 이야기.
친구는 여자친구를 못 잊고 40이 넘도록 결혼을 안했다고 함.
김현철이 이 얘기를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서 듣고
집 오는 택시 안에서 가사를 썼다고 함.
1) 사립학교인 리라초등학교를 다니다가 건설업에 종사하는 아버지를 따라서 사우디에서 가정부가 딸린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귀국해 영동고를 졸업한 정통 '청담동 키즈'임. 그래서 어려서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뿐만 아니라 음악 공부를 위한 악기 등의 재정적 지원도 충분히 받았다고 함
2) 종로학원에서 재수를 했는데 학력고사를 볼 때 교실의 라지에이터가 터지는 바람에 시험을 망쳐서 당시 후기대였던 홍익대에 들어갔다고 함.
3) 홍익대 1학년 때 하나뮤직의 대표 아티스트였던 조동진의 콘서트를 보러 가서, 콘서트가 끝나고 조동진을 쫓아가 데모테입을 건네주어서 데뷔를 하게 되었는데 이게 그 유명한 김현철 1집임. 김현철 1집은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명반 중 하나인데, 19살짜리가 작사 작곡과 프로듀싱 및 악기 연주를 대부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가요에서는 드문 장르였던 팻 메스니, 포플레이 식의 퓨전 재즈와 안토니오 까를로스 조빔의 보사노바를 대중화한 기념비적 명반이기도 함. 대표곡으로는 '오랜만에'와 '춘천가는 기차'가 있음.
4) 요새 한국 리스너들 사이에서 일본 시티팝이 복고적 유행을 타면서 김현철을 '한국 시티팝의 선구자'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시티팝이라는 것은 하나의 확립된 장르가 아니라 일본에서 80년대에 유행했던 하나의 경향임. 당시에 김현철이 일본 시티팝을 들었을 가능성도 거의 없고 정확히 말하면, 일본에서 시티팝의 탄생에 영향을 준 영국식 퓨전 재즈와 재즈 펑크를 김현철이 똑같이 영향을 받아서 비슷한 음악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함.
5) 김현철의 또다른 천재성은 역시 19살에 만든 장필순의 '어느새'가 있는데, 이걸 들어보면 그 어린 나이에 이렇게 쓸쓸한 보사노바 곡을 만들었다는 데 놀라게 됨.
6) 김현철은 너무 충격적인 1집을 내놓은 탓에 그 후로 영원히 자신의 후속작들이 1집과 비교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는데, 특히 4집부터는 브라스 섹션의 비중을 늘리고 전형적인 가요식 발라드가 앨범에 수록되기 시작하고, 때마침 SM엔터테인먼트를 중심으로 불어닥친 아이돌 위주의 가요계 재편과 맞물려서 대중적 인기와 비평적 평가가 떨어지게 됨. 그런데 이때 가수보다는 프로듀서로서 더욱 역량을 발휘하게 되는데, 김현철의 프로듀서로서 최대 성과는 바로 보컬 그룹 '낯선 사람들' 출신으로 대중보다는 매니아들 사이에서 더욱 알려져 있던 이소라를 솔로로 성공시킨 것. 원래 김현철은 안성기, 강수연 주연의 영화 '그대안의 블루'의 동명의 주제곡을 이소라와 불러서 히트시킨 바가 있었는데, 이소라의 솔로 활동을 지휘하면서 '난 행복해'와 '청혼'이라는 명곡을 탄생시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