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예의 철원천도와 관련하여,
밈화되어 혹한의 철원의 기후가 자주 안급되는데(사실 그 당시 철원은 지금과 같은 혹한은 아니었어)
사실 궁예의 철원천도는 그보다 훨씬 큰 문제를 발생시켰으며, 이번글에서는 조금 더 자세하게 궁예의 철원천도가 만들어낸 문제들을 살펴보고자 해

물론 철원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충적평야 지대로서,
험한 산에 둘러싸였으면서도 좋은 평야지대를 보유하여,
한 군벌이 웅거하기에는 매우 좋은 곳이라고 할 수 있어.
하지만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고 거주해야하는 한 나라의 수도로서,
철원평야는 그 규모가 작았다는데 있는데,

여기에 더하여 큰 강 또한 없어 산으로 둘러싸인 철원의 교통은,
타지에서 온 관료와 징집된 군인들, 그리고 그들의 식솔들과 노비, 여러 유동인구가 있는 수도가 되기에는 너무도 불편하였으며,
이러한 부족한 생산량과 불편한 교통은 곧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되었어

사서에 기록된 궁예의 집권시기 철원의 물가는 가는 포 1필을 겨우 쌀 5되와 거래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만 보면 잘 안와닿을 수 있기에,
이를 조선시대와 비교하면,
조선시대 가는 포 한필로 거래되는 쌀의 가격은 시대에 따라 쌀 20~40되였어
물론 시대가 변했기에 쌀 생산력이 높아졌음을 감안하더라도 그만큼 포 생산량도 늘었고,
아무리 생산력이 높아졌어도 경제사학자들 중 나말려초와 조선시대의 생산량의 차이를 2배이상 보는 사람은 매우 드문편인데,
설령 생산량이 두배로 늘었다고 하더라도 철원의 물가는 정상물가의 2~4배라고 할 수 있어
우리 펨창들 중에 현대 자본주의 사회도 아니고, 농경사회에서 인플레이션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펨창이 있을 수도 있으나,
농경사회에서의 인플레이션은 현대의 인플레이션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로,
일반적인 전근대 농경사회를 기준으로 보통 인구의 80% 이상이 1년치 식량을 확보하기가 힘들었는데,
쌀값이 두 배가 되는 것은 당장 식사량을 반으로 줄여야 하는 생존의 문제였어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지배층이 인구 대다수를 희생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일 또한 벌어지는 것이 사실이나
문제는 이러한 사태로 인해 재미를 보는 세력이 지배층 내에서도 너무 소수(궁예 자신을 위시하여 철원 주변에 땅을 가진 소수 특권층)에 불과하였던 것에 또한 있었어
이러한 철원의 '인플레이션'은 본래 궁예의 고구려 재건 명분 아래 모였들었던(물론 호족들 각자의 속내는 자신들의 이득을 또한 계산했겠지만) 패서호족들(천도의 목적 자체가 왕건을 비롯한 패서 지역 호족들에 대한 견제임이 명백했지)을 비롯하여 궁예정권의 대다수 관료집단에게 또한 불리하였으며,(그들 또한 식량을 고향에서 날라오든가, 사먹어야 하니까!)
더욱이 다른 것은 몰라도 백성들의 밥그릇을 직접 위협하는 '식량불안'은 궁예로부터의 민심의 이반을 매우 가속화 시키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 분명해(결국 궁예는 일반백성들의 손에 살해당하는데, 예전에는 작성자도 설마 그 정도 인물이 보리이삭을 훔쳐 먹다 백성들에게 죽었을까 싶지만, 차우세스쿠, 카다피 등의 일반 국민들에게 당한 최후를 보면...)

+ 번외: 철원천도와 관련한 전설
궁예의 철원천도는 민간의 전설로 또한 전해지는데,
천도와 관련하여 한 풍수가는 궁궐의 터를 잡으면서,
궁예에게 자신의 지시가 있을때까지 납작 엎드려 있을 것을 당부하였는데,
궁예는 찌는 듯한 더위와 이상한 소리를 참지 못하여 그만 허리를 일으켰고,
그 순간 학 세 마리가 휙 날아올랐어
순간 새발 사이를 지팡이로 경계를 긋던 풍수가는 일이 잘못되었을 알고는
"이곳은 300년 도읍터인데, 참지 못하고 일어나는 바람에 30년 밖에 도읍터가 될 수 없구나"
라고 한탄하였다고 하며,
궁예가 곤암산을 주산으로 터를 잡자 곤암산은 그게 싫어서 강원도 이천 쪽으로 머리를 휙 돌렸고,
안산이 된 금악산은 서러워서 3년간 나뭇잎을 피우지 않았으며,
용이 문산포로부터 들어다가 용담에서 멈췄다고 해

궁예가 도성을 정할 때 특유의 조급하고 인내심이 없는 성격 탓에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어 불운을 불러들였다는 이야기는 전설에 불과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궁예는 국왕이 되어서도,
세상을 단순한 '군벌'의 마인드로 바라보았으며,
'철원천도'는 그 가장 결정적 증거이자, 그의 가장 큰 실수였으며,
이는 궁예몰락의 가장 큰 원인 이었다는 것이야
* 이상으로 궁예의 철원천도와 그 문제점에 관한 글을 마칠게,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같은 시기의 후백제의 견훤도 그렇고, 만인지적이지만 군주가 되기는 무리였던 듯한 초나라의 항우 등과 같은 인물같이 어쩐지 궁예도 비슷하게 한계를 가졌던 게 아닌가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