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2 00:20

빠르게, 느리게, 저마다의 속도로.

조회 수 168 추천 수 2 댓글 2

  ‘덜커덩, 덜커덩...’ 전차 바퀴가 철로와 마찰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온다.

  ‘... 여기서 어디로 가야 2호선이지? 내선은 뭐고 지선은 뭐야?’

  지하철 까짓 것, 방향만 잘 보면 그만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이제 막 상경한 부산 촌놈인 나로서는 서울의 지하 미궁에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서울역에서 내려, 이리저리 헤매면서 4호선, 2호선을 거치고 결국 동기 자취방에 왔을 때에는 무려 한 시간 반이 지난 후였던 것이다. 덥고 습한 날씨, 동기들과 만난다고 한껏 꾸며 두툼한 옷가지 때문에 등에는 땀줄기가 흘렀으며,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다녔던 팔엔 힘이 다 빠져 버렸다. 그렇게 내 서울 지하철에 대한 첫 인상은 좋지 못한 채로 남아 버렸다.
  마음이 급하지 않았기에 그랬을까, 다음날 친구를 만나기 위해 숙대입구역으로 갈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띄었다. 분명 어제와 같은 길을 되돌아가는 것인데, 쾌적하고 편한 느낌이었으며, 고개를 푹 숙인 채 급하게 걸어가는 사람들도 잘 볼 수 있었다.

부산에서도 꽤 자주 지하철을 타고 다녔지만, 서울의 그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고작 일주일이 조금 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기억을 더듬어보며 내가 느꼈던 것들을 말해보고자 한다.

 

출근길의 노량진역

  나는 운 좋게도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주위에는 그렇지 않은 친구들이 꽤나 많다. 그렇게 되면 재수 혹은 반수를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강남 학원 근처에서 살거나 학원 기숙사에서 지내기도 한다. 그날도 친구 한 명을 만나기 위해 노량진으로 향했다. 자기 수업이 9시 시작이라고, 미안한데 그 전에 와줄 수 있냐하여 흔쾌히 알았다고 했다. 지금에서 생각하니 내가 그 친구에게 고등학교 때 잘못했던 것이 있던 게 분명한 듯하다.

  인파는 상상 이상이었다. 출근 시간이니 사람이 꽤나 많겠거니 했는데, ‘꽤나로 치부할 수 없는 수의 사람이었다. 덩어리가 쓸려가는 곳으로 내 몸도 맡길 수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에 내리기 위해 출입문 쪽으로 다가오는 것도 고역이었다. 출입문 쪽에 서있다 보니 뛰어오다 타지 못하고 다음 열차를 기다리게 되는 사람도 종종 보았는데, 그 당황과 속상함이 오묘하게 섞인 표정이 기억에 깊게 남는다. 구석에 끼인 채로 어디에 가는 길이었을까?’, ‘왜 이렇게 우리는 빠르게, 급하게 살아갈까?’, 그리고 안 되는 것은 서둘러도 안 되나 보다.’ 등의 이런 저런 고민을 해 보았다.

 

동작 대교 위 따뜻한 사람들

  원래 스트레스를 받거나, 잠을 못자면 코피가 자주 나곤 한다. 빈도도 빈도지만 그 양이 꽤나 많아서 한 번은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다가 응급실에 간 적도 있다. 때는 막 전공 시험밤을 이틀 넘게 새웠다-이 끝난 후, 동작구 남도학숙에 사는 친구를 만나고 오는 길에 코피가 터져버렸다. 그것도 자리를 적실 정도로 아주 많이. 앞쪽, 옆쪽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상당히 놀라셨을 텐데, 십시일반으로 휴지를 꺼내주었다. 맞은편에 앉아 계셨던 일본인 모녀분들은 다이죠부? 다이죠부?’를 연신 외치며(사실 다른 말은 못 알아들었다.) 지혈해 주셨고 약간은 음산해 보였던 옆자리 누님은 말 한마디 없이 물티슈를 통째로 주시고는 다다음 역에서 조용히 내리셨다. 나는 피를 멈추고 자리를 정리한 후, 지하철 콜센터에 연락을 드린 후 마침내 내릴 수 있었다.

  끔찍한 기억이지만, 시민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그나마 대학생 A, 코피로 인한 과다출혈로 지하철에서 쓰러져따위의 제목으로 뉴스가 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아름다움,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던 일이었다.




image.png 빠르게, 느리게, 저마다의 속도로.

비 내리는 저녁, 왕십리역 6번 출구

  내가 묵었던 곳은 사근고개 조금 위쪽 언저리였다. 비가 내리는 날, 방에서 쉬던 중 동기에게 연락이 왔다. 비 때문에 그러는데 혹시 우산 좀 가져와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할 일도 없었고, 조금 심심했던 나는 그대로 나갔고 역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병원 올라가는 언덕 즈음 왔을 때였을까, 어디 즈음 왔냐고 묻자 잠실이라고 하였다. 나는 잘 몰랐기 때문에, 좀 이따가 오겠지 생각했고, 왕십리역 6번 출구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고 왁자하게 일행과 떠드는 사람, 무슨 이유에선지 쭈그려 앉아 서럽게 우는 사람, 이를 위로하는 사람, 비를 그대로 맞으며 핸드폰만 보고 있는 사람, 지하철을 놓칠세라 부랴부랴 달려가는 사람까지 지나다니는 여러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너무도 많은, 다양하고 개성 넘치는 사람들이 있음에 새삼 놀랐다. 그 개성에는 틀린 것도, 그러지 말아야 할 것도, 고쳐야 할 것도 없다. 그냥 다른 것이다. 이런 생각을 곰곰이 해보았다.

동기는 30분이 지나서야 계단을 뛰어 올라왔고, 한 대 쥐어박을까도 생각했지만 얘도 늦는 개성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넘어가기로 했다.

 

종강을 맞이하며

  시험이 끝나고, 성적이 하나 둘 산출되면서 자꾸 학교 커뮤니티에 들락날락거리게 되었다. ‘, 이 과목은 A 문제를 이렇게 썼었어야 했네. 틀렸겠지?’, ‘ooo교수님 점수 나온 사람?’ 따위의 글을 쓰기도 했다. 아무래도 첫 학기인데, 동기들이 어떻게 공부했고 시험을 쳤는지 모르다보니 더 그런 곳에 의존하며 고민을 했던 것이다. 그 때 친한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1학년 1학기인데 뭘 그리 고민을 해. 3.5 넘길 것 같으면 그냥 종강 즐겨.”

  그 후로는 더 이상 알림을 확인하지 않고 있다. 현실 도피는 물론 아니다.

 

  그 속도가 느리든, 빠르든 간에 나는 나의 속도로 한 학기를 보냈다. 혹자에게는 경운기가 애쓰며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하철역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처럼, 이는 나의 개성이다. 틀린 것이 아니고, 바꿔나가야 할 것도 아니다. 나는 내 개성에 만족하기에, 남 눈치 보며 대학생활을 이어나가기 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끌리는 대로 살고 싶다. 내 삶은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앞으로 이 다짐을 잊지 않으며,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을 살아나갈 것이다.





1학년 1학기 교양 글쓰기 수업 기말과제였습니다. 그냥 시험공부도 안되고 이리저리 해서 글 뒤적거리다가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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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벨:11]박뚜밤 2020.10.22 01:50
    부럽네요 .. 전 1학년인데 코로나로 대학 생활을 경험해보지도 못 했네요 심지어 늦은 나이에 입학한건데 쩝

    그나저나 작성자분 닉네임 수능 국어할때 외웠던건데 그게 뭔진 기억이 안 나네요 ㅋㅋㅋㅋ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레벨:1]이히리기우구추 2020.10.22 02:09
    박뚜밤 저도 1학년이에요 ㅋㅋㅋ 펨코 중학생때 부터 하다가 이거 때문에 입시 망할 것 같아서 고3때 탈퇴하고 새로 만든 아이디에요 아마 피동 사동 할때 나왔던거 같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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