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1 23:45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조회 수 22 추천 수 3 댓글 1



집안의 맏이로 태어났다는 것은 막대한 기대와 책임을 안고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기대와 책임은 살아가는 내내 족쇄처럼 옭아맸다.

착한 아이여야 하고, 똑똑해야 하고, 남들 보다 앞서야 하고, 동생의 부모 노릇을 해야하고, 부모의 시중도…….
맏이는 모두 부모의 육아실습 대상이 된다.
실컷 두들켜 패고 억압하며 키운 내가 엇나가자 엄마는 동생을 품 안의 자식으로 키웠다. 불면 날아갈까, 내놓으면 누가 데려갈까 걱정하며.

초등학교 저학년 때 친구와 동네 수영센터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샤워 시간이 길어진 친구를 두고 혼자 집으로 돌아온 나는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목소리와 표정은 싸늘했다.
혼자 돌아왔다는 이유로 실컷 혼이 난 뒤에야 받은 밥상에서 된장찌개 국물과 김치와 밥만 집어먹는다는 이유로 밥그릇을 뺏겼다.
익힌 야채를 먹지 못했기 때문에, 된장찌개 속의 애호박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날 나는 불도 켜지 않은 화장실에 갇혔다.
한참 뒤, 동생을 씻기기 위해서 날 꺼내준 엄마는 된장찌개 속의 애호박만을 건져 밥과 비빈 뒤에 씽크대에 서서 먹게 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전부였다. 불을 켜지 않은 부엌에서 다용도실의 불빛에 의존해야 했고, TV 조차 켜지 않은 고요함 속에 동생을 씻기는 엄마와 동생의 재잘거림만이 들렸다.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학원을 다니지는 않았다. 차라리 학원을 다니는 것이 나았을 지도 모른다.
엄마는 학기마다 과목당 문제집을 두 권 씩 사서 풀게 했다.
문제집의 앞 표지에는 라벨지가 붙여졌고 그곳엔 파란 매직으로 <예습>과 <복습>이 적혀졌다. 
처음 틀린 문제는 빨간 색연필, 두번째 틀린 문제는 초록색, 세번째 틀린 문제는 파란색.
틀린 문제가 있는 페이지는 비스듬하게 접혀져 책장의 끄트머리가 책 위로 뾰족하게 튀어나와있었다.
그 뾰족한 것이 어린 가슴을 후벼팠다. 
어느 날이었다. 머리를 세번 쥐어박히고 울면서 문제를 다시 풀어도 같은 답이 나왔다. 해답지를 잘못 본 탓이었다. 사과는 없었다.
어느 날이었다. 머리에 똥만 가득찼다는 욕을 들었다. 문제를 틀려 혼난 뒤 화장실을 가던 중 들은 소리였다.

그러나 그 일들은 결국 나만이 기억하는 일이 되었다.
엄마를 향해 쏜 과거의 기억은 "내가 언제?" 라는 화살촉을 달고 내게 다시 돌아왔다.
울부짖어도 소용은 없었다. 이미 엄마에겐 그런 안좋은 일들을 괜히 기억하는 내 탓이었을 뿐.
남들에겐 말 할 수 없었던 개명의 진짜 이유는 내 이름 석 자가 내 숨통을 조였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내가 잘못했을 적마다, 거의 매일, 내 이름 석 자를 외치며 효자손으로 엉덩이를 내리쳤다.
부러진 효자손의 파편이 이름에 박혀 수 년 간 날 괴롭혔다.
성인이 되자마자 개명을 한 것도 그 탓이었다. 교수님이 출석을 확인하기 위해 부른 이름 석 자가 숨도 쉬지 못 할 정도로 목을 조였다.
새롭게 살기 위해, 아니 적어도 '나'로 살기 위해선 이름을 바꿔야 했다.

그랬었는데, 그런 사람이 이젠 내 앞에서 나를 나무라는 아버지께 울부짖으며 말한다.
내가 왜 애를 더 잡지 못했는지 아냐고, 쟤 일기장 한 번 이라도 들추어 본 적 있느냐고....
또 나만이 기억한다. 십수년 전의 어린 아이. 일기장에 쓴 부모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들켜 찢어진 일기장 페이지 속에서 허우적 거리며 울고 있던....
내가 언제 그랬냐는 마음을 후비지는 소리와 명치에 꽂히던 양장본 일기장의 모서리.
나의 아픔이, 엄마가 무시했던 나의 아픔이 이젠 아버지를 욕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나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엄마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부족한 인간으로 성장한 나는 과연 누구의 탓을 해야할까.

기억하지 못하는 내 사랑해 마지않는 그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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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벨:22]H:D 2021.01.12 00:13
    부족함을 채워가면서 살아가는게 또 하나의 살아가는 재미 아니겠습니까 화이팅 하십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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